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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의 역사

 

고대

 

 

 

 

 

 

 

 

 

 

 

 

 

 

 

 

 

 

 

 

 

 

 

 

 

 

 

 

 

 

 

 

 

동성애 박해의 시작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허용된 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하인 342년에 동성애에 대한 처벌이 처음으로 입법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수동적 위치의 동성애자만을 처벌하는 법이였으므로 기독교 교리와는 큰 관계가 없었다. 성인 남성의 수동적 성교를 비하하던 그리스적 사고의 형법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4세기에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적인 국교로 삼은 테오도시우스 1세는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규탄했다. 이후 538년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에서 “자연에 반하는 행위를 하거나, 자신의 머리칼에 선서를 하거나, 여타의 방식으로 신을 모독하는 자”를 고문을 가한 뒤 화형에 처하도록 규정하면서 계간죄, 소도미 개념이 탄생하였다. 이때부터 동성애는 교회법에 의해 죄악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동성애는 자위행위나 피임처럼 신이 허용한 성교의 본래 목적인 종족 보존과는 무관한 탐욕적인 성행위내지, 이교도의 우상숭배라는 해석을 하여 성경의 계율을 어긴 범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중세 시대 유럽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동성애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수도원이나 기사단처럼 남성 중심의 단체에서 동성애 관계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도 동성애는 결코 광범위한 사회적 인정을 받은 적은 없으며, 폐쇄적인 궁정 사회와 일부 시민 사회에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정도로 그쳤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동성애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서는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로 보이는 인물이 많이 있다. 영국 극작가 셰익스피어와 말로위, 이탈리아 화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카라바지오 등이 대표적이다.

영국에서는 올리버 크롬웰 집권기의 시범 실시를 거쳐, 1533년 헨리 8세 재위 중 동성애자를 교수형에 처하는 소도미법을 공포하였다. 1540년 7월에 이 법에 따라 월터 헝거포드 남작이 최초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 법률은 처벌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해석에 맡김으로써 동성 간 성행위 및 수간 등에 대한 처벌의 실제 집행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그 정도를 달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법은 이후 유럽과 제국주의하의 식민지 국가들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1500년대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에스파냐는 많은 원주민들이 공개적이고 자연스러운 동성애 관계를 맺는 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결국 에스파냐 침략자들은 동성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화형, 개에게 먹이로 주는 등의 공개처형을 시행하였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에 기독교 문화가 유입되며 동성애에 대한 박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송나라의 왕조는 남첩을 두었다는 공식 기록이 남은 마지막 왕조가 되었고, 중앙아시아 문화와 불교의 영향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성생활을 즐기는 문화가 감퇴되었다.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매춘 활성화를 막기 위해 남창을 법적으로 금지시키기도 하였으나 제대로 행정된 적이 없었다. 명나라 시대의 푸젠 지역은 동성결혼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여전히 동성애 관계에 대해서 관용적이였다. 명나라의 황제 정덕제가 하미에서 온 이슬람 지도자인 사이드 후세인과 연인 관계였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의 오랜 역사 기간 동안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동성애 박해가 주류를 이루진 못하였고 청나라 후기에 와서야 서구의 동성애 혐오주의가 점차 확대되었다. 결국 청나라는 성매매가 아닌 동성애 관계도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다.

과거 동성애 관계도 문화의 중요한 일부 중 하나였던 많은 멜라네시아 문명 사회들에서도 유럽인들이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동성애 혐오주의가 대두하였다.

이슬람학자인 토마스 바우어에 따르면, 꾸란에서 반-동성애적인 문구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동성애자들에게 관용적이였다고 한다. 800년대부터 1800년 사이의 아랍-이슬람의 문화 역사에서 동성애 혐오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슬람 문예가들은 동성애를 다루는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19세기에 들어서야 서양의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근동지역에서 '비전통적인 성교행위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1979년까지 근동이나북아프리카지역에서 다른 남성과 동성애적 관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은 기록은 한건도 없다.

 

 

 

고대 시대의 도자기 파편에는 이성애를 다루는 그림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다루는 그림들도 자주 발견되어왔다. 

아시리아에서는 동성애가 보편적이였으며 금지되거나 비도덕적인 것으로 치부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시리아의 종교 경전에서는 동성애 관계를 축복하고 있다.《주문역서》에서는 신자들이 여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간의 대등한 관계를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성인과 소년 간의 동성애, 즉 '그리스식 동성애'(Greek love)가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다. 이는 예술품이나 저작 활동, 신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고, 성관계 대상의 동성·이성 여부보다는 성관계에서의 나이, 사회적 지위에 따른 적극성 여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유명한 일화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형적인 동성애 관계에 가까웠고, 후대에 일종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기원전 5세기경 플라톤의 저서 《향연》은 소크라테스의 동성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같은 소년과 성인 남성 간의 동성애에 대해 특별한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설립 이후 그리스식 동성애는 더 이상 쉽게 수용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로마인은 이를 이질적인 그리스 풍습이라 여겼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상류 사회에서는 여전히 그리스식 동성애 문화가 일부분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서도 313년 기독교 공인 전까지 일반적으로 남성간의 성 접촉이 허용되었으나, 기원전 2세기경 스칸티니우스 법에는 시민 소년을 강제로 추행하거나 성인 남성인 시민이 스스로의 의지로 수동적인 위치에서 성 관계를 맺었을 경우 처벌하는 조항이 있었다. 로마 군대 안에서 동성애가 일반적으로 행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 제국기의 유명한 동성애자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티누스 등을 들 수 있다.

인도의 고서 《카마수트라》에도 동성간 성교가 묘사되어 있다. 여러 고대 인도 도자기 작품에는 동성애 관계인 신들과 여신들이 표현되어 있으며, 왕과 여왕들의 동성간 사랑 이야기도 구전되었다.

 

고대 중국의 여러 고서에서는 동성애와 관련된 문장들이 발견된다. 진 헌공이 쓴 책에서는 숙적에게 젊은 미남을 보내 유혹한 후 나쁜 조언만을 주게끔 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학자 반광단은 한나라의 거의 모든 황제가 남첩을 두었었다고 말했으며, 사마천 또한 군주들의 남성 반려자에 관한 사료를 남겼다. 특히 애제와 그의 남첩인 동현과의 일화가 유명한데, 그로 인해 성어 단수지폐(斷袖之嬖)는 동성애를 지칭하게 되었다.

3세기 말 유송 시대에는 이성애 만큼이나 동성애도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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