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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의 역사

 

근대

계간죄 폐지

 

1791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는 형법에서 최초로 동성애를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는 동성애, 이단, 마법, 신성 모독 등 모든 "피해자 없는 범죄"를 비범죄화한 것 중 하나로, 피해자가 없으면 범죄도 없다는 개념이다. 1810년의 나폴레옹 형법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었으며, 그 이후에 프랑스 제1제국과 그와 같은 혈족의 왕들이 유럽을 통치했으므로 유럽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 동성애가 비범죄화된다.

오스만 제국은 1858년 탄지마트 개혁을 실시하면서 동성애를 합법화하였다.

1861년 잉글랜드 웨일스에서는 동성애 처벌이 사형 대신 징역으로 바뀌었다. 1917년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가 주도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역시 동성애를 합법화한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후 법이 조금씩 개정되어 동성애는 다시 불법이 되었다.

일본은 1872년 동성애를 범죄화하였으나 1880년 프랑스 민법전을 참고하여 형법을 개정함에 따라 다시 합법화되었다.

1957년, "성인 사이에 합의한 사적인 동성 간 성행위는 더이상 범죄 행위로 취급받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울펜덴 보고서(Wolfenden report)가 영국에서 출판된다. 이후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서구 국가들은 동성애를 금지한 법을 폐지한다.

동성애자들이 결집하다

중동국가의 동성애자 사형식

세계 최초의 레즈비언과 게이 잡지. 《Die Freundin》과 《Die Eigene》

동성애자들이 결집하다.

 

중세 이후 계속된 탄압을 감수해야 했던 동성애자들은 20세기를 즈음하여 활발한 인권 운동을 펼치게 된다. 여기에는 도시와 산업의 발달로 인해 다원적으로 변하고 한층 자유로워진 사회상, 인본주의 의식의 성장에 따른 동성애자 내부의 결집력 강화 등 시대적 상황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소위 동성애 운동으로 통칭되는 조직적 저항은 차별 철폐라는 성과를 낳았고, 동성애자의 인권 수준이 다소 향상되는 진전을 보이게 된다. 특히, 20세기 중반을 넘기면서부터의 동성애 운동은 서방 세계나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인 변화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널리 평가받고 있다.

1897년 5월, 세계 최초의 성소수자 인권 단체인 과학적 인도주의 위원회(독일어: Wissenschaftlich-humanitäres Komitee, WhK)가 마그누스 히르히펠트에 의해 베를린에서 결성된다. 이 단체는 남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한 형법 175조(Paragraph(§) 175)의 폐지를 촉구하는 등 LGBT의 법적 박해를 반대하고 사회적 인정을 주장했다.

1924년 8월 8일, 세계 최초의 레즈비언 잡지인 《Die Freundin》(여자친구)의 초간이 베를린에서 간행되어 1933년까지 출판되었다. 이를 출판한 동성애 인권 단체인 인권 연맹(독일어: Bund für Menschenrecht)은 1920년대에 48000명의 동성애자 회원을 갖고 있었다.

 

홀로코스트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이후 유럽 대륙에서 동성애자들은 나치당의 여러 박해 대상 중 하나가 되었고, 결국에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1933년부터 동성애 단체들은 강제 해산되었고, 동성애나 성에 대한 학술서들은 불태워졌으며, 나치에 속한 동성애자들은 암살되었다. 나치의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는 동성애자들을 기록해 목록으로 만들었고, 그들은 "독일의 성 관습"에 따르도록 강제되었다.

1933년과 1945년 사이에, 약 100,000명의 남성들이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 중 50,000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68] 대부분은 일반 교도소로 보내졌지만, 약 5,000~15,000명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68] 5,000~15,000명 중 몇 명이나 수용소에서 죽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주요 학자인 뤼디거 라우트만은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동성애자의 사망률이 60%나 됐을 것이라 주장한다. 수용소의 동성애자들은 강간, 생체실험 등 특히나 더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용소의 동성애자에 대한 박해는 대부분 나라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동성애자 남성은 나치 정권 때 수집된 증거를 바탕으로 다시 수감되기도 했다. 독일 정부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박해 행위를 인정했으며, 2002년에는 게이 커뮤니티에 사과했다.

핑크 트라이앵글은 원래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동성애자를 표시하기 위한 분홍색의 역삼각형 모양이었지만, 1970년대 부터 게이 프라이드와 동성애자 권리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핫핑크색의 삼각형 모양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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