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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는 예방될 수 있다

 

독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앞서긴 하지만 그래도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용어 정리를 해두자. (Human Immunodeficiency Virus)는 말 그대로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자체를 의미하며, AIDS(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 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인체의 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질환에 감염되는 상태를 말한다.

 

정확히 말해 HIV 자체는 인간을 죽이는 게 아니다. HIV에 감염된 인간은 AIDS 상태로 진행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따라서 사회 전반 대한 계몽은 비감염자의 HIV 감염 예방과 HIV 감염자 혹은 AIDS 환자에 대한 인식 개선을 두 축으로 한다.

 

다행히도 한국은 인구 대비 HIV 감염자/AIDS 환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편이지만, 이로 인해 사회적인 현시(visibility)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예방 교육 역시 다른 나라에 비해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미국의 예를 들어보면, HIV 감염자의 상당수는 남성동성애자/흑인/빈곤층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인권 보호 접근을 할 때 HIV 예방에 관한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이슈로 따라 붙는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HIV와 AIDS가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지도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 미국에서의 HIV 감염 예방에 대한 관점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80년대 초반 미국에서 AIDS가 처음 발견됐을 때 사람들이 이 질환이 남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초기에 발견된 환자들은 대부분 남성 동성애자들이었으며 바이러스의 존재는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때마침 정권을 잡은 보수 레이건 정부는 남성 동성애자들이 이 신종 질환에 특히 취약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홍보했다. 70년대를 지나는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LGBT 인권 운동의 기운을 빼내는 데에도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이 질환의 예방법은 너무 늦기 전에 발견되었다. 콘돔을 사용하는 것. 이미 감염된 사람들의 모습은 여전히 비참했지만, 발견된 바이러스는 연약하고 감염률도 높지 않았다. 체액과 체액이 직접 맞닿는 경우가 아니면 감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구강으로도 전염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상황이 더 호전됐다. HIV 자체를 제거하는 일은 여전히 불가능하지만, 사용하고 있던 몇 종류의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혼합해서 동시에 복용하면 이전과는 달리 엄청나게 효과적인 질병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미 AIDS가 발병한 경우에도 상태는 크게 호전되었고, AIDS의 단계로 발전하지 않은 환자들의 경우는 질환의 진행 속도를 크게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당뇨나 고혈압처럼 관리만 잘하면 오래 살 수 있는 병”이 된 것이다. 흔히 ‘칵테일 요법’이라고 부르는 이 치료법의 정식 명칭은 고효능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요법(highly active antiretroviral therapy: HAART)이며, 현재까지 이 방식의 기본 원리를 유지되고 있다.

HIV와 AIDS에 대한 히스테릭한 반응이 중지되고 나자, 사람들은 그간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위에도 언급했듯, HIV 자체는 생각보다 감염성이 높지 않았다.이성애자들 간의 질 삽입성교로 HIV가 전염될 가능성은 0.01-0.38% 정도로 추산되며, 구강성교에 의한 전염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제로에 가깝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가장 위험한 그룹으로 추산되는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에도 1회의 항문성교로 HIV에 감염될 가능성은 3%가 넘지 않는다. 당연히 섹스를 한 번 하고 마는 건 아니니만큼 저런 추산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횟수가 반복되면 전염 가능성은 높아질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숫자들은 “술집에서 만난 여성이 호텔에서 하룻밤 지낸 뒤 거울에 ‘에이즈에 걸린 걸 환영해(Welcome to AIDS world)’라고 써놓고 떠났다”는 식의 도시괴담의 힘을 잃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칵테일 요법의 효과를 입증하는 연구가 더 늘어났다. 우선 20세에 감염된 직후 치료를 받을 경우 감염자의 기대 수명은 51.4세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환자가 70대까지 생존할 것이라는 예측이 된다. 21세기 초엽만 해도 30년 정도였던 기대 수명이 20년 이상 증가한 것이다.

 

참고로 미국인 남성의 기대수명은 77.4세다, 또한, 이 연구는 환자가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HIV 치료제가 나올 것이라는 점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의학이 더 발전하면 기대수명은 계속 길어질 것이다.

 

두 번째 효능은 HIV 감염자가 치료제를 먹고 혈중 바이러스 농도를 낮게 유지하는 경우, 그가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염시킬 가능성은 실질적으로 없다는 연구 결과들을 통해 입증되었다. 2008년 스위스 연구팀에 의해 발표된 이 결과는 이때까지 HIV 예방 정책 전체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콘돔 사용은 여전히 유용하다. 하지만 HIV 감염자가 최대한 빨리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고 적극적인 치료를 받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백신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 21회 항바이러스와 기회감염 학회에서 발표된 대규모 연구 결과 역시 이 같은 결론을 뒷받침했다. 다시 말해, HIV/AIDS 환자라도 치료제를 복용하고 적절하게 관리를 받는 경우, 콘돔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타인을 감염시키지 않는다.

비슷한 접근법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트루바다는 부작용이 적고 하루에 한 알만 복용하면 된다는 점에서 더 큰 주목을 끌었다. 연구 결과는 흥미로웠다. 사건 발생 후 72시간 안에 약을 복용하기 시작해서 28일간 지속하는 경우 감염률이 대폭 낮아진 것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이 ‘노출 후 예방법(Post-exposure prophylaxis: PEP. 펩이라고 읽는다)’을 위험한 직종에 근무하는 이들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인정하고 지원하고 있다. 상대의 감염 상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지다가 콘돔이 터졌거나 약물이나 술에 취해 위험한 성행위를 한 사람 역시 가만히 앉아 불안에 떠는 대신 응급실로 달려가면 된다는 옵션이 생긴 셈이다.

 

PEP의 성공에 고무되어 나온 PrEP(노출 전 예방법: Pre-exposure prophylaxis. 프렙이라고 읽는다)은 이보다 더 과격한 접근을 한다. 아예 비감염인이 예방을 목적으로 HIV 치료 약을 지속적으로 먹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이 예방법에 대한 연구는 세계적 규모로 여기저기서 행해졌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데, 결과는 역시 긍정적이다. PrEP 역시 감염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결과를 토대로 FDA는 2012년 트루바다의 PrEP 사용을 허가했고 대부분의 의료보험 회사들이 보험을 적용해주고 있다. 며칠 전에는 역시 같은 원리를 이용해 몇 달마다 직접 주사약을 넣을 경우 100% 예방이 가능하다는 동물 실험 결과가 보고되기도 했다.

 

PrEP의 도입과 성공은 특히 남성 동성애자 집단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80년대 이후 게이 커뮤니티에서 콘돔의 사용은 불문율이었고,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이런 관점은 같은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HIV 감염자 집단과 충돌을 야기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미 감염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콘돔 사용으로 득을 볼 일이 없다. 그렇다면 감염자끼리의 콘돔 없는 성관계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혹은 이미 감염자의 감염 사실을 안 비감염자과 감염자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하나?

 

이런 이슈는 지난 10년 동안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왔는데, 위에서 언급한 감염자의 실질적인 감염불가성과, 비감염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예방법’의 도입은 이전의 “무조건 콘돔을 사용하자”는 접근법의 효과를 무력화시키는 결과로 연결되는 중이다.

 

2014년 현재 이런 최신 연구 결과들과 그에 따른 예방법 접근이 미국 사회를 크게 바꿔놓는 중이다. 요약하자면, 지난 30여 년간의 의학의 발전은 HIV 감염자나 AIDS 환자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염시킬 가능성 역시 제거했으며 비감염자 역시 적극적으로 감염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해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관점이 중산층 이상의 남성 동성애자들만을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HIV에 의해 LGBT가 받아온 고난을 생각하면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AIDS는 무서운 병이고 걸리지 않을 수 있다면 걸리지 않는 편이 좋다. 하지만 걸렸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 숙주가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조기 진단과 적극적인 치료다. 한 명의 환자를 치료해서 그의 혈중 바이러스 농도를 낮추는 것은, 이후 그와 접촉할 모든 비감염자에 대한 백신으로 기능하게 된다. 따라서 감염자를 보호하고 치료하는 것은 사회적 비용으로 감당할 근거가 있다.

부디 이런 상황 변화에 대한 인식이 한국 감염자들에 대한 인식 변화와, 비감염자들에 대한 예방 캠페인에도 반영되기를 기대해 본다.

HIV에서 완치된 두 환자의 사례를 다룬 책 ‘Cured’

올해 오스카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1980년대 미국에서는 불법인 HIV 치료제를 밀수해서 에이즈 환자들을 살린 남자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세 번째 효능은 HIV 감염이 ‘기능적’으로 완치될 수 있다는 발견이었다. 비록 아직 HIV 자체를 신체에서 없애버리는 치료법은 가능하지 않지만, 감염 초기에 발견된 환자들이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복용할 경우, 일정 시간 이후 더는 약물을 복용하지 않아도 면역세포가 감소하지 않으며 AIDS로도 발전하지 않는다는 케이스가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비록 모든 이들이 완전 치료라고 불릴 정도로 약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구 대상 중 15% 정도에서 완치에 가까운 효과가 확인되었고 그 외의 환자들에게서도 초기 치료가 중요하다는 점은 이의의 여지 없이 확인되었다. 또한 며칠 전에는 유전자 치료를 통해 감염자의 AIDS 진행을 멈추거나 느리게 만들 수 있다는 점 역시 보도됐다.

 

항바이러스 치료제의 네 번째 효능은 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2004년 FDA의 승인을 받은 트루바다(Truvada)는 두 가지 항바이러스 제재를 결합한 알약인데, 이전까지 사용되던 약물들에 비해 부작용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큰 인기를 끌었다. 항바이러스제의 원리와 적은 부작용에 주목한 연구자들은 흥미로운 접근법을 생각해냈다. 만일 누군가가 HIV 감염 확률이 높은 경험을 했을 때, 예를 들어 감염자의 피가 묻은 주사기에 찔렸다든가 감염자가 신체 내에 사정한 경우, 즉시 이 치료제를 투여하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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